2022. 2. 2. 20:53ㆍjournal
정신 차려보니 어느 새 30대의 끝자락에 섰다.
오늘은 평소 옷을 잘 사지도 않는데 늘 자리가 부족하고 정신 사납기만 하던 옷장을 정리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막상 까보니 20대때부터 입던 낡은 겨울 옷들이 가득했다.
빅뱅이 잘 나가던 시절 뭔가 유행했던 번뜩이는 패딩잠바, 처음 취직했을 때 아부지가 백화점에서 사 주신 모직 코트, 옷소매 형광 노란 끝동이 포인트였던 화이트 컬러 자켓, 동화면세점 근처 작은 가게에서 질렀던 코트, 엄마가 사주셨던 브라우스들, 6-7년 전 사진에서도 이미 몇년 째 입고 있었던, 이젠 동글동글 뭉쳐 제거하기도 어려운 보풀이 일어난 코트까지.
뭔가 이제 다시 입기엔 너무 낡았거나,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데 살짝 촌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젊은이 느낌이라 40을 목전에 둔 아줌마에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그런 디자인이라 살짝 걸쳐봤을 뿐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아 이제 나도 진짜 늙긴 늙었구나.
사실 버리지 못 하고 옷장에 다시 잘 넣어둔 목도리와 스카프들도 10년 넘게 쓴 아이들이 많아, 처음에 살 땐 이 색깔이 아니었을텐데- 싶기도 하다. 근데 뭐, 저기 어느 나라에는 버려진 옷들이 홍수를 이룰 정도로 패션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 장난 아니라는데, 목도리 색깔 좀 변했다고 굳이 새로 살 필요는 없지.
어쨌든 단호한 마음으로 이제는 걸칠 수 없는, 하지만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옷들을 아파트 헌옷수거함에 내다버릴 준비를 끝냈다. (당근으로 내놓기도 미안한 지경이고 귀찮기도 하고)
살짝 시원섭섭하면서 못 내다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진을 찍어둘까 하다가 관뒀다. 이 옷들을 입고 돌아다녔던 그 시절의 내 모습에 대한 기억이, 굳이 싸이월드 사진첩 같은 걸 뒤져보지 않아도 조금씩 되살아나는데, 그런 기억은 꼭 이 아이들을 집 안에 잔뜩 쌓아두고 있어야지만 소환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긋지긋 미래를 알 수 없는 백세 시대에 내 인생은 아직 반도 안 왔고, 이렇게 십수년만에 옷들을 내다버릴 날들은 아직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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