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야 한다
2011. 1. 14. 22:50ㆍjournal
틸다 스윈튼이 나오는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봤다.
영화 감상평을 적기 전에 이렇게 주절대기 시작하는 이유는,
도무지 이런 느낌을 준 영화를 만난 게 너무 오랜만, 혹은 처음이라,
지금 이 기분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글로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찾고 리사이징을 하고 뭐라고 감상평을 적을까 고민하는,
작위적인 행동을 하기 이전에,
지금 느껴지는 이 먹먹한 기분을 가진 그대로 주절댈 필요가 있다.
영화가 끝난 뒤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평소 때 나오던 출구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달무리 진 구름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바람에 쓸려 지나가고,
이어폰도 없이 생으로 느끼는 파리의 밤거리에는,
나지막한 조명과 귓가에 울리는 바람소리, 그리고 지나다니는 몇몇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너무 낯설고 이상한 느낌인데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그대로 계속 거리를 걸었다.
몇번이고 지나다닌 길이었는데도 너무 생소한 느낌이라,
사진기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바로 지금 이 장면장면들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단 말이지.
아무것도 없이 조용한 거리를 지나,
물결이 무섭게 출렁이는 시커먼 센느강도 지나고,
점점 불빛이 많아지고 가게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많아지는 중심가로 들어서자,
그 때서야 정신도 조금씩 들고,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지고,
버스타고 집에 갈 생각도 들더라.
사람이 많은 복작복작한 거리가,
내가 늘 살아왔던, 서울에서든 파리에서든, 그 곳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난데없는 남의 나라에 와 있다.
아직 지나지 않은 길도 많이 남아있고,
가보지 않은 곳도 많이 있다.
몇몇 아는 곳, 아는 길이 눈에 익었다고 이제는 지도도 사진기도 안 들고,
마치 이 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처럼 그렇게 돌아다니지만,
그건 내가 이 곳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주 5일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을 퍼자는,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어진 나의 일상에 익숙해진 것이리라.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꼭 내가 지금 자리한 물리적인 위치를 떠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내가 어디에 떨어지든 결국 그곳에서의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눈이 멀어버리는 것과 같다.
내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 있는 눈이 멀어버리는 것과 같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와 있는지,
내가 지금 속해있는 곳은 어떤 곳인지,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해지는 동시에,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잃는다.
쿵- 하고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지만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번쩍 뜨인다면,
나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필요할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마치 처음보는 것처럼 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답답한 무언가를 계속 지닌 채로,
나는 지금 매우 안정적이고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으며,
물론 그것은 거짓일 수도, 거짓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여튼 그런 믿음 속에서 더 이상 다른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눈을 떠야 한다.
계속해서 돌이켜보고, 발견해야 한다.
내가 왜 굳이 이것저것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시력은 계속 떨어지고,
나의 뇌는 자꾸 맨들맨들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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