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싸움의 기술 - 정은혜

2021. 5. 9. 17:05my mbc/bouq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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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렇게 자라났으며, 나에게는 이런 것이 중요하고,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것이라는 자기만의 믿음이 자기의 역사를 서술하는 스토리의 형태로 존재하고, 이 스토리를 사수한다. 그런데 이 스토리의 플롯을 흔드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설득해서 자기의 세계관을 관철시키려 하고 자신의 이야기 구조로 끌어들이려고 하거나, 혹은 상대방이 어떻게 잘못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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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싸울 때 상대방의 잘못을 보여주는 증거를 하나 꺼내놓고 그것으로 상대방이 자신에게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라고 종용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그동안 모아놓은 증거를 다 늘어놓고 상대방에게 죄가 있음을 확증하고자 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른다.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결론을 먼저 내고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는 아주 흔한 사고 패턴이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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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혜 작가가 출연한 한 팟캐스트에서 싸움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오 이것은 내가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라고 생각하여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 말에 사고 올해 초에 읽었던 것 같아서 기억이 가물가물) 

 

그런데 막상 책을 사서 끝까지 읽었는데 (술술 잘 읽힘) 내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서 은근 실망했던 기억도 난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더욱 완전무결한 논리와 방법론들로 무장하여 완전 더 잘 싸울 수 있게 되어서 상대방(이라고 쓰고 신랑이라고 읽는..)을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은데, 여러가지 이유로 그 기대를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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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 책은 확증 편향을 갖고 상대방을 단죄 ㅎㅎ 하고 싶어하는 나를 너무 꼬집어내는 바람에 내가 추구하는 완전무결함에 손상을 입었다. 이 책에서는 내로남불의 유식한 말인 귀인 편향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나의 잘못에는 응당 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지만 쟤는 애가 애초에 글러먹어서 저러는거다. 대충 뭐 그런거지.

 

하지만 상대방의 유죄를 확증하고 그 이유를 상대방 내재적인 것으로 귀인시키지 않으면, 도대체 이 수많은 유죄의 증거들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 고통 받아야 한단 말인가 ㅋㅋㅋㅋ ㅠㅠㅠ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실생활 속에서 자꾸 되새김질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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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이 책에서 얘기하는 싸움의 원인은 결국 공고하게 지켜온 개개인의 '스토리'가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지난 싸움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왜 이런 사람이 아닌 것 처럼 보이게(여겨지게) 만드냐'며 화를 내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아 결국 나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어떤 부질없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

 

아니 근데 그러면 뭐 어쩌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자라서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이런 사람이라는데... (응 상대방에게도 그런 스토리가 당연히 있는거니까 자꾸 귀인 편향 하지 말라는 것이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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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전체적인 느낌이 뭔가 병법? 해결책? 처럼 내는 것이 결국 법륜스님의 어떤 것과 결을 같이 한다는 것..

 

이 책을 나만 읽고 있으니, 나만 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더욱 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상대방은 그냥 언제나처럼 그대로 남아있을 것만 같다는, 나의 이 노력이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하는 억울함이 남는, 그런 느낌? 

 

특히 어떤 부분에서는, 상대방이 당연히 협상 테이블에 앉아 충분히 협조적인 자세로 어떤 프로세스에 참여할 거라는 아름다운 상황이 전제 되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해서, 협상 테이블에 상대를 앉히기까지에 필요한 노오력의 과정이 너무 생략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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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 혼자 싸움의 기술을 익혀서 상대방을 이겨먹으려고 했던 이기적인 마음가짐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싸움의 기술... 

 

난 그냥 계속 이렇게 남탓하며 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