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결정적 순간 보고 왔다

2022. 7. 3. 19:34journal

29cm에서 가끔 전시회 얼리버드 티켓을 파는데, 전시 정보 잘 모르고 있다가 가끔 만나면 반가워서 하나씩 사둔다. 그리고 보통은 효녀 코스프레 하며 어무이랑 같이 가는데, 사실은 어무이가 아무 날짜에나 시간 맞춰 같이 갈 약속 잡기에 제일 편한 파트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 날


사진전은 서초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고, 나는 토요일 오전 11시 40쯤 전시장에 들어갔는데 입구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전시를 보는 중간에 사람이 좀 늘어났던 것 같음. 전시를 다 보고 나오니 총 2시간 정도 걸렸다.

얼리버드로 10,000원에 구입한 티켓. 대신 전시기간보다 유효기간 짧음 주의.

20대 때까지만 해도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온갖 필름 카메라를 종류별로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자타공인 ‘찍사’를 맡았던 나인데, 사실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이 좋아지면서부터인지 혹은 내가 30대를 넘어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인지, 어느새 내가 그렇게 사진을 좋아하고, 많이 찍고, 또 잘 찍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를 보면서 사진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마음이 살짝 뭉클했던 것 같다. 전시회장에 사진 전공생들이거나 사진작가이신 분들도 관람 오신 것 같았는데 왠지 너무 멋있고 부러웠고, 기념품샵에 결정적 순간 사진집도 판매 중이었는데 사진 하는 사람은 이 책을 쟁여놓고 얼마나 행복할까 싶어 또 부러웠다.

현장에서 마음이 동했던 사진 작품들 몇 장 남겨 본다.

회화 드로잉을 먼저 시작했다는 그의 작품들은 매우 그림 같은 구도를 보인다.
마치 그림 위에 그림을 덧붙인 것 같은 묘한 구도의 사진

그의 사진들은 한발짝 멀리에서 보면 다 그림 같다. 설명을 들어보니 실제로 찰나의 순간에 그 어떤 기하학적 구도를 잡아내는 예술가적 본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음.

장면 하나에 담을 수 있는 함축적 의미가 해석되길 바랬던 그가 긴 코멘트를 남긴 몇 안 되는 작품.

그리고 인물에 주목하게 만드는 사진이 많다.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찍는 초상 사진도 있지만, 한 순간에 지나가버릴 수 있는 그 어떤 한 장면에 주목해 만들어낸 사진에는 항상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있다. 중국 화폐 가치가 하락한 날 은행 앞에 몰려든 군중들을 찍은 저 사진 속에서, 신기하게도 이 와중에 혼자 웃고 있는 남자가 발견되는 식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처절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한 순간 실소가 터지고, 웃음이 나는 것이 인생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

춤을 추는 것인지 피가 튀는 것인지 모를 난민 캠프의 혼란 그 자체를 담았는데 아름다움.

미스테리우스 한 앙리 마티스의 뒷모습

유대인들에게 정체를 숨기고 게슈타포에 밀고를 하던 여성이 붙잡혔다. 그녀를 바라보는 군중의 시선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역사이고 기록이다.

특히 이 데사우 나치 강제 수용소 사진을 볼 때는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림도 연출도 아닌, 실제 저 순간을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라이브 영상을 일시정지 한 것 같은 기분.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밀고자 여성 한 명에게 향해 있는데 그 표정들 하나하나를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여왕 즉위식 기다리다 잠들었는데 혼자 못 일어난 나 같은 남자 ㅋㅋㅋ

그리고 같은 휴머니즘 느낌인데 좀 더 유머러스하고 센스 있는 장면들도 많다. 다 부서져 가는 건물들 속에서도 너무 즐겁게 놀고 웃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라든지, 아니면 저렇게 이불킥의 순간이 박제당한 ㅋㅋㅋ 길바닥에서 잠든 남자라든지 ㅋㅋㅋ

The Decisive moment 라는 제목을 만나기 전까지 나열한 제목 후보들. 순간, 시간, 찰나, 본능 등의 개념을 놓고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 사진집의 편집자였던 테리아드에게 보낸 편지 등 그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 받은 서신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일개 직장인이 느낀건, 아 이런 사진 천재도 이렇게 자기 영업(?)을 열심히 하고 전시회든 사진집이든 성공적으로 메이드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 뭐 그런 ㅎㅎㅎ 거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1908년 출생인 것도, 매그넘 포토 공동 설립자 였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았었던 것 같은데!), 사실 허리가 꺾여라 키스하는 연인의 사진은 로버트 카파의 것이라는 것도 제대로 몰랐던 무식한 나지만 ㅋㅋㅋㅋㅋ 전시장에서 무료 제공하는 오디오클립으로(QR코드만 찍으면 바로 접속 가능) 도슨트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람하니까 모르던 사실도 많이 알게되어 좋았고,

특히 다큐멘터리 영상들이 너무 좋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지 알게 되니까 그의 사진들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시간과 체력을 넉넉히 갖고 가서 이 영상들을 풀로 다 보고 온다면 좋을 듯.

전시보다 배고파졌던 내가 나중에 보려고 남겨두는 링크
Pen, Brush & Camera (링크)
The Decisive Moment (링크)

마지막으로, 엄마랑 집에 돌아와 전시를 복기하면서 검색하다 보니 MoMa 사이트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이 300장 넘게 아카이빙 되어 있었다. (링크) 그 중에서 이번 전시에는 없었지만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언뜻 보고 기억에 남았던 Rue Mouffetard 의 어린이 ㅋㅋㅋ 사진도 하나 남겨둔다.

와인일까 물일까 누가 뭘 시켜서 들고가는거길래 저렇게 뿌듯할까 ㅋㅋㅋㅋ


아 진짜 마지막으로,
예당 앞에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살짝 차를 갖고 서초역으로 내려가서 어무이에게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피자집 피제리아 호키포키를 소개해드림. (나도 처음 가봄)

주차가 가게앞에 두 대 정도 가능하고, 건물에도 작게 주차장이 있긴한데 운이 나쁘면 주차를 못 할 수도 있는 정도의 협소함이라 가게 오기 전에 전화로 확인하면 좋을 듯. 나는 운이 좋아서 겨우 주차를 하고 먹었다.

피자는 종류가 좀 되는데 직원분이 많이 찾으시는걸로 추천해주셔서 잘 시켜 먹었다. 하지만 정작 아무거나 시켜도 괜찮다던 엄마는 할라피뇨를 다 떼놓고 드심 ㅋㅋㅋㅋㅋ  으르신이랑 갈때는 무난한 치즈피자, 페퍼로니, 블랙올리브 정도 시키는 게 나을 듯.

여튼 맛있긴 했는데 막 일부러 약속을 또 잡고 한 번 더 찾아갈 정도는 아니고 근처 지나다 피자 땡길 때 가면 만족할 정도. 별 3.5개 드립니다. (갑자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