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5. 14:04ㆍmy mbc/ciné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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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제 개막작으로 알게 되었을 때부터 봐야지 봐야지 했는데 결국 넷플릭스로 봤다.
안타깝게도 다음 평점 2점대, 네이버 평점 6점대의 가혹한 평가를 받은 영화지만, 절대 안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고아성, 주종혁 배우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나 역시 주인공처럼 첫 직장을 그만두고 타국으로 떠났던 경험도 있고, 그렇게 떠나가 평생 호주에 살고 있는 친구도 두 명이나 있는 것이 진짜 이유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 회사 관두고 뉴질랜드로 떠났다는 20대 후반 여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그냥 넘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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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고아성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스물여덟 주계나는 한겨울에 바람이 들이치는 집에서 재건축만 바라보며 버티는 부모님과 함께 인천에 산다.
학자금 대출 갚으며 홍익대 졸업해서, 서울이라 통근이 빡세지만 남들 보기엔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직도 했고, 스무살 동기 시절부터 사귄 곱게 자란 남자친구는 직장만 찾으면 바로 결혼하자면서 늘 함께할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출신이나 학벌, 재력 등등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에서 본인은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만 느껴지고, 그렇게 추운 겨울의 나라 한국이 답답해진 그녀는 햇살 좋고 따스한 뉴질랜드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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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주계나의 이민 정착기를 나랑 비교하면서 보는 게 재밌었다.
이주 초반엔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생활비 벌려고 식당 아르바이트 하면서, 굳이 떠나온 내 조국의 사람들이랑 관계를 맺고, 말 배우겠다고 학교 다니고, 두근거리지만 사실은 위축되어 있는 그런 상태지.
그러다 좀 익숙해지고 나면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생기고, 이 나라에서 문화생활도 즐기고, 여기서 보내는 매일의 일상이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현지인 다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그러다 어느 날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 목소리만 들어도 갑자기 평생 핍박 받고 차별 받으며 살아온 외국인 노동자 마냥 서러움이 폭발하고 눈물이 질질 흐르기도 하는 그런 복합적인 정체성.
나는 짧게나마 경험했고, 내 지인들은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을 그런 모습이라서 공감이 너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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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엔 주인공 나레이션이 많이 들어가서,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했는지 직접 설명하는데, 그녀의 뉴질랜드 생활 3년차 즈음부터는 나레이션이 거의 없이 그녀의 언행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보게 되는 방식이다.
특히 어떤 일을 계기로 그녀가 한국에 들어와서, 그동안 가족과 친구들, 구 남친 등등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지, 조금은 이방인처럼 한 발 떨어져 살펴보고, 이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나레이션 없이 지켜보게 된다.
영화에 다 담기지 않은, 그녀가 한국을 떠날 마음을 먹기 이전의 시간은 직접 전해들을 필요가 있었지만, 뉴질랜드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우리가 그녀의 변화를 함께 지켜봤기 때문이겠지.
허옇던 피부는 햇살에 건강하게 그을린 색이 됐고, 길고 착 달라붙던 검은 생머리는 자연스럽게 구불대는 염색 머리가 되고, 옷차림도 자유롭고, 타투도 좀 하고.
외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태도에 있어서도, 피곤하고 냉소적으로만 보였던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 등이 점점 다채로워지는 것이 보였다.
왜 우리는 한국에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없나. 끊임없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운데, 정말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찾아나갈 수 있는 시간을, 왜 한국에서는 그렇게 갖기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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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인터뷰인지 뭔지를 하면서 대기업 IT계열에서 일한다고 대답한 그녀에게 “왜 그 일을 선택했냐”고 묻는 서양 인터뷰어에게 계나는 내가 선택한게 아니라 “회사가 나를 선택했다”고 답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나라면 또 진심 반 포장 반 섞어서 뭐라도 대답했겠지. 저렇게 메타인지 확실히 돤 상황에서 곤조 있게 답변할 수 있는 계나의 성격이 부러웠다.
초중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안정적인 직장 찾으라고 종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의 무엇이 좋아서 선택하여 얼마나 만족하며 살 것인지 얘기하는 경우는 참 드물다고도 느꼈다.
계나와 같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도 딱히 이렇다 할 답을 찾진 못한 채 현실의 이런저런 것들에 타협해 직장살이를 하고 있는 나로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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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 영화 속 인물이나 설정, 크고 작은 사건사고 등 디테일을 다루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크고 작은 인종차별, 갑자기 한국 대변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들, 동병상련 커뮤니티, 내가 그토록 불만을 갖고 떠나온 한국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은 가까운 사람들, 나의 바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 찾아오는 기회, 혹은 그냥 예전처럼 안주할 수 있는 기회 등등.
영화가 참 계나 성격만큼이나 차분하고 조용하게 이 모든 얘기들을 소소히 풀어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가 생각이 날듯 말듯 한데, 옛날엔 그냥 뭉뚱그려 일본 영화 스타일이라고 했겠지만 꼭 그런건 아니고.
24년 11월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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