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5. 11:00ㆍmy mbc/ciné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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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간단한 소개글만 읽고도 너무 흥미로워서 찜해놓고, 언제 차분히 앉아서 볼까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 남편 없는 저녁에 혼자 앉아 조용히 보기 시작한 영화.
시작하자마자 단 몇 분 만에 나의 모든 집중력을 다하게 만들어 러닝타임 끝까지 몰아붙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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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인 바딤 피얼먼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 찾아보니 무려 우크라이나계 캐나다계 미국인 감독이라고 함.
영화는 독일, 러시아, 벨라루스에서 공동 제작했고,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스토리라고 하는데 원작 소설도 따로 있다.
유대인 질 역할에는 아르헨티나 배우인데 가족의 영향인지 프랑스어로도 연기하는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독일 장교 코흐 역할에는 독일 배우이면서 무려 랩퍼라고 하는 (ㅎㅎㅎ 상상이 안 간다) 라르스 아이딩거 두 사람이 열연했다.
나치나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이면서 모두 영어로 말하는 미국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유대인 수용소를 운영하는 독일 나치의 이야기를 각 나라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영화인 점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졌는데, 아마 감독도 배우도 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보니까 더 새롭게 다가온 부분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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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감상을 최대한 간결히 적고 싶지만, 줄거리와 디테일들을 읊지 않고서는 내가 느낀 것들을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고, 너무 하나하나 다 소중히 곱씹으면서 생각하고 싶어서,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가득한 감상을 길게 늘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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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길거리 총살형을 피하기 위해 아주 우연히 본인을 페르시아인이라 속인 유대인 질이 하필이면 평생 소원이 페르시아어 과외 받기 였던 독일군 장교 코흐(클라우스)가 있는 수용소로 끌려오게 되면서 생긴 일이다.
주인공 질은 본인의 진짜 정체를 끊임 없이 의심 받으면서, 목숨 부지를 위해 가짜 페르시아 단어를 창조해 가르쳐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슬프지만 현명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수용소의 유대인 수감자들 한 명 한 명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어가는 것.
하루하루 생존하는게 급급했기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유일하고 유용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겠지만, 몇 개월이 지나 점점 페르시아어 과외에 익숙해질수록, 그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의 괴로움 또한 점점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여기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러나 꼭 죽을 것만 같다는 그 공포를 안고 사는 괴로움에 코흐 장교로부터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저들과 달리 혼자 살아남아버렸다는 괴로움까지 더해졌겠지.
게다가 배우가 너무 왜소한 체구에 까맣게 더러워진 얼굴을 하고 그 안에서 하얗게 빛나는 안광의 소눈망울로 연기를 해버려서 감정 이입이 더 잘 되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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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코흐 장교를 보면 또 어떤가.
그는 유대인 학살에 전념하는 다른 군인들과 다르게, 하루빨리 페르시아로 떠나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안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속마음이 태도로 드러나서일까. 그는 부대 내에 윗사람과도 아랫사람과도 그다지 잘 다져놓은 관계가 없는 아웃사이더로 그려진다.
그런 그의 앞에 아기다리 고기다리 페르시아인이 나타났으니 지겹고 흥미없는 수용소 군인 생활에 얼마나 소중한 한 줄기 빛이었겠나. 매일 새로 배운 단어를 열심히 외우면서, 주변 군인들이 씹든 말든, 과외 선생님을 어찌나 살뜰히 챙기는지 이 사람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을 받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장교가 자기 마음을 시로 적어 읊었을 때,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 사람이 갖고 있었을 선함, 이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가족들과의 기억, 이 사람이 소망하는 소박한 꿈 같은 것들이 너무 평범하고 깨끗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중에 자신이 배운 언어가 페르시아어가 아닌데다가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말이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충격과 실망이 클까 걱정까지 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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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다행히도 내가 그렇게 생각없이 나치 독일군의 서사에 버무려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단 주인공 질이 절대 그렇게 동화될 수 없었을테니까.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공포, 언제든 뜬금없이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공포, 독일군 눈 밖에 나면 죽을 지경이 되도록 괴롭힘을 당하고, 죽어서밖에 끝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될거라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어떤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없다는 진짜 공포가 에워싸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목줄을 쥔 채 이기적인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이건 절대 우정도 브로맨스도 뭣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합리화 하면서 배부른 소리 하는 독일군 장교가 자기 이득을 위해 수용자 한 명을 등쳐먹으면서 자아도취 된 것에 불과하다.
영화는 내가 그걸 못 깨달을까봐 막판에 친절히 장교의 마지막을 처절하게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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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더 먹먹해지는 건 뭘까.
2천자가 넘는 단어를 배운 두 사람이 그들만의 언어로 얘기하는 장면들에서 특히 그랬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간의 동질감이라는게 있는건데, 지금 여기 전혀 다른 입장에 선 단 두 사람만이, 끊임없는 살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상황. 그 관계성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했다.
자신이 죽음을 방조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통해 자신의 진심을 나누는 독일군.
군부대 안에서 자기 딴에는 참 외로웠을 장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고, 마음을 표현한 상대가 하필이면 절대 그 마음을 받아들여줄 수 없는 입장이라니. (적어놓고 보니 넌씨눈..)
게다가 질이 언어를 만들어낸 과정을, 그 매일의 시간을 알기에 이 아이러니한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슬프면서도 참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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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름에서 착안해 단어를 만든다고 해도 그걸 다 외운다는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질이 장교에게 “이름이 없는 건 알려고 하지 않아서다.”라고 말하는 순간 울림이 왔다.
가상의 언어로 대화를 구사하는데 이르를만큼 충분한, 2840개의 단어를 만들고 외울 수 있었던건 질이 그들을 기억하려고 했기 때문이구나.
그리고 그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눈물 콧물 질질 흘릴 수 밖에 없게 됨 ㅠ 어떻게 보면 예측 가능한 결말인데도 전혀 생각지도 못 하고 있었어서 머리통을 세게 후려맞은 느낌이었음.
영화의 모든 장면에 몰입했지만 특히 마지막 30분은 정말 감정적으로 휘몰아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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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너무 초등학교 독후감처럼 늘어놓은 것 같은데, 홀로코스트는 워낙 내가 감히 뭐라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그 와중에 ‘언어와 교감’이라는 인간적인 소재를 가져다 쓴 바람에 내가 보고 느낀 걸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어쨌든 너무 좋은 영화를 발견해서 이번 달의 잘한 일로 꼽아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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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근에 최재천 교수의 책 ‘양심’ 출간회 영상 같은 걸 봤는데, 교수님이 말하길 이제 이 사회에서 양심이란 단어는 쓸모를 잃고 소멸된 것 같다고 했다.
예전처럼 양심 없는 놈이 크게 욕 먹지도 않고, 오히려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은 세상처럼 보이기까지 하는데, 이처럼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겠는가 걱정도 하셨다.
또 교수님 말씀으로는, 동양에서는 양심이 어진 마음이라는 뜻으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하는 어떤 도덕적인 것으로 해석되는데, 서양에서는 conscience, 함께, 알다, 과학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법이나 사회가 함께 지키기로 약속한 양심, 좀 더 공동의 어떤 최소한의 것을 지키자는 마음에 가깝게 해석된다는 거다.
갑자기 왜 이 영상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https://youtu.be/PLE3YXCoUiY?si=pplxggbSL24Kbb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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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나 진짜 무식한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반에 장교가 질한테 페르시아 수도 어디냐고 물어보는데 테헤란이라고 대답해서, 그 때 정체 들통 나서 죽는 줄 알았자나… 이란에서 페르시아어를 쓰는지도 몰랐음.
세계사를 좀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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