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2020. 6. 22. 12:42my mbc/bouquin

 

p.60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p.63

반면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재를 공유할 필요가 없고, 서로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도 않다. 품격 있는 권력자의 고매한 태도를 연출할 때, 의전을 수행하는 실무자는 그 무대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p.64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 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p.219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다시 표현한다면, 이는 결국 "순응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면 개인이 국가나 고용주[등]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국가와 고용주[등]가 개인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당신은 혹시 나에게 장애가 업석나 장애가 없는 척하지 않으면 이 회사에, 학교에, 영화관에, 식당에, 정부 건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당신이' 제공해야 한다.

 

 

#.

책읽아웃 인터뷰를 들을 때 굉장히 쾌활하고 위트가 넘쳐서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분, 김원영 변호사는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다. 책읽아웃 인터뷰는 '희망 대신 욕망' 이라는 다른 저서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지금 독서일기를 쓰고 있지만, 책을 다 읽은 게 몇 개월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이 책 내용은 내가 이 분의 인터뷰 팟캐스트를 듣고 기대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았다. 어떤 에피소드들을 대할 때는 나에게도 일어났거나 일어났었을 법한 일들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데, 뭔가 개념을 설명하고 정립해나가는 부분에서는 읽으면서도 알아들은 게 맞나 싶어서 몇 번 씩 다시 읽어보게 되는 느낌?

 

#.

그나마 깨달은 점은 두 가지다.

우선 나는 그 동안, 장애인을 마주쳤을 때 비장애인을 마주친 것과 다름없이 행동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조차 장애인을 의식해서 행동하는 무례한/위선적인 일이 아닐지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나의 '무심한 척'이 퍼포먼스용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장애인 이동권이 훨씬 더 잘 보장되어 있는 사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보다 자연스럽게/자주 어울리는 사회였다면 애초에 내가 이 정도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우리는 아직 너무나 비장애인 위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

장애가 있는 사람은 병명이나 등급으로 나뉘어 '장애인'으로써 받아들여질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초상화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각자의 서사가 있는 인생으로써의 개인을 마주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그 첫 번째 서사를 접할 수 있게 좋은 글을 내 주신 김원영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다음엔 희망 대신 욕망을 읽어봐야겠다.. 이게 좀 더 쉽다는데...)

 

 

2020.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