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8. 20:00ㆍmy mbc/bouquin
p.21~25
당신이 계속 인내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차별받아 본 적 없는 이가 어떤 차별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건 차별받는 이의 입장입니다.
(...)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p. 27
그런데, 차별이란 애초에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자는 팔짱을 끼고 앉아, 열심히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약자의 '자기 얘기'를 듣습니다. 강자는 약자의 경험마저 쉽게 얻습니다. 당신이 이런 대화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상대가 자신에게 부족한 차별의 경험을 나눠달라고 정중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p.103~106
경험에서 배제된 이들이 경험 속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느끼고 있는 이들의 감정을 멋대로 재단할 권리는 없습니다.
(...)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의 토대를 키웠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양 가해에 일조한 채로 살아왔거나, 적극적으로 가해했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
p.118~120
전형적인 두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제 페미니즘보다는 휴머니즘과 같이 포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쪽이 낫다며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이들. 그리고 성평등은 추구해야 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편파적이니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쓰자며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문제시하는 이들입니다.
(...) 두 전형적인 입장에는 각각 '여성문제가 부차적이라는 임의의 가치판단'과 '어떤 문제에서도 발언권을 잃지 않겠다는 고집'이 들어 있습니다.
(...)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유효하지 않은 것 같고, 누구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의 설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것 같아서는 아닙니까? 여성이 바로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페미니즘은 여태껏 소외되었던 여성의 목소리에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운동입니다.
#.
이러다 책 전문을 옮겨 적게 생겼다.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얘기가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저자인 이민경씨가 애초에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얘기가 어디에도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본인에게 적절한 언어가 없어 자책하며 방황하다가, 더 이상 이렇게 시간 낭비 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큰 뜻을 품고 만들어 주신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모르니 알려달라'는 상대에게 온 힘을 다해 설명하는 동안 스스로의 인내심과 지식의 한계부터 확인하며 위축되고, 그나마 상대가 대화를 할 의지가 있고 이 정도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그럼에도 대화를 하는 동안 너무 지치고 왠지 상처를 한 번 더 입은 것 같>은 본인과 본인 주변 사람들이 부디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되기를 바라며 썼다고 저자의 말에서 밝혔다. 이 심정마저 토씨하나 안 틀리고 너무나 동일하다.
#.
이 책에서 계속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와 대화하지 않을 권리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나처럼 쉽게 발끈하고 흥분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대화 가능 여부를 차근 차근 판단하고 대화를 이어갈지 말지 결정하기 이전에, 미끼를 물어버린 물고기나 도둑놈 바짓가랑이 물어버린 셰퍼드처럼, 대화의 폭포문을 열고 다시는 닫을 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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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런 대화 때문에 최근에 남사친 그룹들과 술자리에서 결별을 선언하게 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각 그룹의 특징이나 배경 등은 조금씩 달랐지만, 나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 공통점이 있었다면, (1) '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부심이 각자의 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 (2) 뭘 알지도 못 하면서 '너의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평가를 내림 (3) 그러면서 계속 '그러니까 너는 이렇다는거야?'는 식의 질문과 함께 '들어는 보겠다'는 수혜적인 입장으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함.... 정도 되겠다.
또 내가 공통적으로 실망한 부분은, 이들은 나의 교육 환경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그 수준 이상의 환경에서 교육 받고 사회화 된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화가 불가능할 수 있나? 하는 점. 평소 다른 주제로 대화할 때에는 설사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 서로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가 한결같이 같은 주제에서 종국을 맞게 된단 말인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년을 알고 지내 오던 남자들 누구나 '페미니즘'을 꺼내드는 순간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내가 너무 일방적인 주장을 펼쳐서, 내가 너무 화를 내서, 내가 자기들 말을 안 들어줘서, 내가 윽박질러서 등등의 이유로 대화를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한 나를 비난할 수 있겠으나, 과연 그 대화에서 다른 잘못된 점을 찾을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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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랑 쉽게 연을 끊을 수 없어 몇년 째 자아 분열을 겪으며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신랑은 내가 이런 저런 술자리에서 여성 차별 사회에 분노하다가 절교하고 오는 걸 보더니, 아마 내가 친구를 다 잃고 자기만 붙들고 살까봐 두려웠는지,
(1) 3040 한국 남자 99%가 그러하니 (2) 네 인간관계의 존속을 위하여 앞으로 대화 주제 선정에 유의하는 것이 어떨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난 또 빡침.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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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거의 끄트머리에 가서 나오는 실전 대화 연습 챕터인데, 실제로 내가 겪었던 대화들과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그건 남녀를 떠나서..." - 이 문제에서 왜 굳이 남녀를 떠나야 해?
"그렇게 과격하게 말하니까 불편하네" - 나도 내가 설득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친절하게 말해. 너는 이 문제에서 니 기분이 중요한 줄 알고 있구나. 맞은 사람더러 비명을 예쁘게 지르라고?
"노동문제는? 환경은? 보편인권은?" - 네가 노동, 환경, 보편인권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 요즘 넌 뭐하니?
그러나 나의 경우 효과는 별로 없었다.
가장 강력한 효과는 절교...
#.
사실 이 책에서 주는 가이드를 따라 아무리 강인한 마음으로 대화를 주도하려고 노력해봤자, 상처 받을 사람은 여전히 상처 받는다. (그건 바로 나)
친구를 다 잃고 돌아와도 위안 받을 수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인 책.
202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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