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2020. 8. 3. 12:32my mbc/bouquin

p.23
여성이 '평균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은 추상적이라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여성이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에 있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감각으로 경험된다.

 

p.33
누군가는 여전히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p.101
그렇다고 두가지 비하성 언어가 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까지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김치녀'는 '사치를 부리며 남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야 하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 있다는 평가를 포함한다. 정상이라는 억압적인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이다.

'한남충'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 역할 규범을 요구하는 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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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독 남녀불평등에 대한 구절만 따와서 그렇지만, 이 책은 사회 전반의,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민이자, 여성이자, 비장애인이자, 서울 사람인 나도 저지를 수 있는 생각 없는 차별적인 언행과 사고방식에 대해 아주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있다면 당연히 '그들'이 존재하는 배타적 구조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꼭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로 특정되지 않더라도 언제든 차별하고 또 차별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없이 발생하는 차별적인 언행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주의하고, 조심하고, 신경 써야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는지 덧붙여 설명한다.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고,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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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분노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는데, 전자의 감정은 내가 여성으로써 이 사회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에게 필요한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에 겪은 억울함 - 아니 이렇게 쉽게 글로 풀어져 있고 이 글 속에서 모든 것이 이렇게 명명백백한데도, 스스로 글 한 자 찾아본 적 없는 무책임하고 무심한 남자들을 대해야 했다니? 때문이기도 했다.

 

후자의 감정은, 내가 한국 사회의 여성으로써 내 스스로를 돌아볼 때 외에는, 아마도 늘 쭉 계속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였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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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나는, 대학에서 처음 만난 대구 친구에게 "아파트 살아?" 라고 물어봤다가 거의 알고 지낸 평생동안 욕을 먹었고 (아마 그 친구는 이 다음에 만나도 또 날 욕할 것이다 ㅠㅠ)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피어싱샵 문의글에 내가 아는 홍대샵을 추천하는 답글을 달았는데, "네 전 서울에 살지 않아서 못 갈 것 같지만 답변 감사해요"라고 인심좋게 대답해 준 아량 넓은 분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적도 있었다.

 

'실격당한 자들의 변론'을 읽으면서 돌아봤던 비장애인으로써의 내 모습도 그랬고, 그 외에 내가 깨닫지 못한 많은 모습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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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아보며 갖는 반성의 시간 속에서도 분노는 계속해서 스믈스믈 치밀어 오른다.

 

이 분노는 이런 책을 읽을 때나, '듣똑라' 같은 여성진행자들이 꾸리는 팟캐스트를 들을 때도 계속 쌓인다. 정작 이런 객관적인 콘텐츠들을 접해야 할 인간들은 왜 공부하지 않고 있는데, 나만 계속해서 이렇게 공부하고 듣고 읽고 배우는 게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 너 메갈이니? 라고 물어봤던 OOO, 여자들도 한남충이라고 하잖아 라고 항의?했던 OOO, 내가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그럼 너네(여자)는 이렇게 느낀다는거야? 라고 질문했던 OOO,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라며 어이없어 했던 OOO까지.

 

내 주변에 차고 넘치는, 남자사람들이여,

제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2020.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