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6. 14:28ㆍjournal
2003년부터 유지해 오던 뿅닷컴 도메인을 날려버렸다.
html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던 홈페이지가 설치형 블로그를 거쳐 티스토리로 오기까지 하나의 url을 지켜온 것은 나름 자부심이었기에, 막상 날려버리면 크게 아쉬울 줄 알았지만 아무 느낌이 없다.
일단 예전만큼 블로그를 열심히 쓰고 있지 않기도 하고,
게시판 중심으로 운영했던 홈페이지를 블로그로 전환하면서 내 인생의 매 단계마다 함께해 준 지인들이 뒤섞여 소통하던 공간의 정체성도 사라졌다. 게다가 이젠 나를 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주위에 별로 남아있지도 않지.
그러다 보니 해마다 얼마씩 결제해 가며 유지하던 도메인이 한층 더 부질없이 느껴졌다.
뿅닷컴의 전신인 아이비로에 설치했던 html 홈페이지도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열어보니 그 공간의 주 자산이었던 20년 된 제로보드 게시판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컴퓨터 잘하는(? ㅋㅋ) 지인에게 물어봤는데, 아마도 게시판 사양이 너무 뒤처져버리면서 뻑 난 것 같다는 식의 답변을 들었다.
글도, 사진도, 열어보고 읽어보면 전혀 나 같지 않아 늘 새로웠던 과거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이건 도메인 날리듯 자의로 결정한 건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다.
이런저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이것저것 백업도 받긴 했던 것 같은데, 사실 백업 자료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1도 모르는 게 웃긴 포인트.
하지만 마치 싸이월드 문 닫으면 인생의 절반이 날아갈 듯 두려워하다가도, 막상 십수 년 넘게 미니홈피 한 번 안 열어보고 잘만 살았던 것처럼, 이 역시도 곧 무던해지겠지.
우리 고양이들 사진 열심히 모아 올린 인스타그램이나,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이 티스토리 블로그도 언젠가 부질없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참 의미 없다.
얼마 전엔 나의 최애 영화 중 하나인 ‘싱 스트리트’를 다시 보고 싶어서 네이버 시리즈온에 들어갔다. 몇 년 전에 내가 소장용으로 구매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 놈들이 ‘소장‘ 콘텐츠의 ’이용기한 만료‘라면서 그동안 내가 구매한 영화들을 다 볼 수 없게 해 둔 것이다. 내가 돈을 지불했음에도 네이버가 허하는 기간만큼만 소장할 수 있었던 걸 나는 몰랐다.
그 후에 리디페이퍼에 책을 다운로드 받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디가 어느 날부터 내가 ‘소장’한 책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엔 가족들이 사서 읽은 책들이 책장 한가득이었다. 가족들이 선택한 책을 읽고 자랐으니, 그것이 우리를 가족으로써 더 비슷한 부분이 많아지도록 만들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당연히 영향이 있었겠지?
그런데 (비록 나는 애가 없지만) 만약 내가 우리 집의 취향과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내가 읽은 책으로 전수하고자 할 때, 일단 물리적으로 가득찬 책장이 없으니 아이가 알게 모르게 노출될 환경이 없을 것이고, 전자책을 손에 들려주며 구매 목록을 열어줬는데 ‘이용 기한 만료’로 읽을 수가 없다면?
멜론과 넷플릭스의 세상이 오면서 소유가 구독의 개념으로 바뀌었다고 했던가.
비단 책, 음악, 영화 같은 것 뿐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나의 기억과 기록들도 디지털화를 거치면서 특정 플랫폼에 종속되고, 거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와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최근 7일 내 블로그 검색 유입 로그에 누가 ’뿅닷컴’을 검색어로 넣고 들어온 게 눈에 걸려서, 찾아주는 건 고맙지만 도메인 돈 안 내서 이제 뿅닷컴은 없어진다는 얘기를 길게 해봤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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