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가 내 처지를 걱정하다

2024. 11. 24. 14:11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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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은 남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는데, 최근에 남편이랑 둘이 나름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2016년도 프로듀스101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포맷에 따라 - 심사위원 앞에서 개인기 평가로 등급 선정, 타이틀 곡으로 개인 실력 평가 후 무대 위치 선정, 보컬/랩/댄스 포지션별 그룹 대결 등의 순서로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도 - 팀별 리더랑 센터 정하기, 뽑아둔 리더나 센터가 그 자리에 맞지 않아서 중간에 교체되기, 포지션 선정 때문에 싸움나거나, 독재적이거나 태만한 누구 때문에 팀 불화 생기기 등으로 동일하다. 그러고 나면 마지막은 진실의 방에서 서로 툭 터놓고 소통해서 극복하고 좋은 무대 보여주거나, 혹은 극복하지 못 해서 그럭저럭 대충 무대 마치기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됨.

몇 년 전부터는 어떤 오디션 프로를 봐도 연습생 실력이 세정이, 청하, 소미 급으로 뛰어난 경우가 없어서 사실 저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게 너무 지겹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이런 프로들을 시청하는 것은 어떻게든 성장해서 결국에 봐줄만한 무대를 만들어내는 애들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애들 얼평이나 하는 못난 어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건 애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게 아니라 어른들의 돈을 벌어다주기 위한 것이란 걸 알지만, 아이돌 산업 얘기로 들어가면 끝이 없어지니 일단 나의 길티플레저 고백은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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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장 스토리가 되고,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순간은 팀별 연습과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항상 팀별로 공연 무대를 보여주기 직전에 그 팀의 리더 선출과정이나 그 이후의 연습과정 같은 걸 에피소드로 보여주는데, 보다보면 결국 리더의 유형은 아래 정도와 같다.  

1) 뛰어난 개인 실력을 바탕으로 그룹 연습을 직접 지도하며 진행하는 리더
2) 본인의 실력만큼 뛰어난 팀원을 준리더로 등용해 함께 그룹 연습을 진행하는 리더
3) 팀원 피드백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 방법을 밀어붙이는 리더
4) 실력 여하를 떠나 팀의 화합과 분위기를 최우선시 하는 리더
5) 직접 리드하려고는 하지만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모르는 리더

예전에는 1,2,4번 유형을 옹호하고, 3,5번은 욕하면서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4번을 더 이상 옹호할 수 없어진 동시에 5번 유형에게는 차마 욕이 안 나오는 내 스스로를 발견했다. 욕은 커녕 너무 공감이 되어서 마음이 아플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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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회사에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서, 내가 믿고 따르던 리더는 없어지고 나와 주니어 팀원만 남은 상황이 됐는데, 그러다보니 내 직책이 리더급은 아니지만 팀원을 이끌면서 결정을 내리고,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입장이 됐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쉽지 않다.

나 혼자 다 알아서 하라고 하면 그냥 나한테 익숙한 방식대로 어떻게든 일정에 맞춰서 뭐라도 해냈을텐데, 나한테 뭘 알아서 하라고 시키는 사람이 없어지니 무슨 일을 해야할지부터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와중에 나의 오더를 기다리는 팀원이 있으니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도 알려줘야 한다. 난 원래 삽질을 하면서 해내는 스타일이니까 너도 그냥 같이 삽질할래?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명쾌하게 할 일을 정해서 오더를 내려주는, 질문에 답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은데 나조차도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봐야 겨우 어떻게 될지 알랑말랑할 것 같은 상태라 도대체 리딩을 할 수가 없다. 어떤 결과를 내야하는지는 명확한데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모른달까.

굳이 핑계를 대자면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 솔직히 무리이고, 잘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또 객관적으로 이에 동의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회사 일이란게 또 뭐든지 잘 될 수 있는 일만 오더받고, 좋은 환경에서만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말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후배에게 미안한데 나도 답을 모른다, 사실 나 좀 삽질하는 중인데, 이게 잘 안 되더라도 니 탓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답을 찾을 때까지 좀 기다려줘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요청하겠다,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서… 나의 막막함을 ㅋㅋㅋㅋ 나누는 것 뿐?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를 치지만 웃고 있지 않아 웃을 일이 아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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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5번 유형의 아이를 보면서 진짜 비난할 수가 없었다. 혼자 연습하라고 하면 지 몫은 해내고도 남을 것 같은데, 최소한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도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떻게 내 것을 만들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남에게 알려줄 수도 없다.

5번의 리드를 가진 팀들도, 결국은 무대를 잘 해냈다.

이 프로그램이 5번 리드가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무슨 노력을 했는지,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좀 더 보여줬다면 나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을까.
9 to 6 에만 고민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회사 밖을 나서는 순간 더 노오력을 할 마음이 없어지는 게으른 나는 결국 몇 번의 리더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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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 픽은요.

송승호
남지운
신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