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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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_연인들 - 정이현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급하게 몰아닥친 태풍은 어느새 그쳤고, 그 후에는 폭풍우가 쓸고 간 해변을 서서히 수습해가야 한다. (...)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 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알랭 드 보통이랑 같이 쓰기로 했다가 그냥 독립된 이야기 두 개를 내놓기로 했다는, 정이현씨의 사랑의 기초 시리즈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어 찾아 읽었는데, 뭔가 아주 쉽게 빨리빨리 읽히면서도 그 정도의 가벼움이 전부는 아닌, 공감가면서 씁쓸한 글이다. 여..
2012.06.17 -
조용한 혼돈 - 산드로 베로네시
또 시작이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만약 비가 오지 않으면 ㅡ 지금은 오지 않는다 ㅡ 두 사람, 즉 딸의 학교 앞에 있는 사람과 그를 찾아온 사람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정원에는 골드 레트리버 아가씨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ㅡ 오늘 아침엔 보지 못했다 ㅡ 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거나 ㅡ 이번엔 앉아 있다 ㅡ 있다. (...) 만일 이곳에 와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날 괴롭히는 일이 사람들의 습관이 되고 있다면 , 나는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날 더 이상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나는 나일 뿐 그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었다고 하는 '조용한 혼돈'은, 띠지에 나와있는 영화포스터를 보고, 만약 내가 있을 때 개봉..
2012.01.09 -
7년의 밤 - 정유정
소녀가 내 목덜미를 만진 건 네가 술래야, 라는 뜻이 아니었다. 네가 졌어, 벌을 받아야지, 라는 뜻이었다. 나는 영원한 술래였다. 잡지 못하면 벌을 받고, 잡으면 벌을 면하는 불공평한 술래. 언니가 혼자 읽으면 진짜 무섭다고 해서, 절대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만 읽었는데, 뭐 그렇게까지 심하게 무섭지는 않았지만, 언니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충분히 공감은 갔던 책. 문학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읽는 한국작가의 책이었는데, 이야기 자체는 (이야기의 배경이 꽤 예전 세대의 한국임에도 불구) 범세계적으로 읽혀도 손색 없을 만큼 세련된 편. 처음엔 주인공 이름이 자꾸 헷갈려서, (나도 늙었나봐 ㅠㅗㅠ) 좀 적응이 안 됐는데, 누가 누군지 한 번 싹 정리하고 나니, 몰입도가 백 배 상승. 살인으..
2011.09.16 -
골든 슬럼버 - 이사카 코타로
인간의 최대 무기는, 습관과 신뢰라고 했던 모리타의 말을 떠올린다. 야, 모리타, 그게 아니라 인간의 최대 무기는, 오히려 웃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요새 읽는 책들이 하나같이 기대 이상으로 재밌어주시는 바람에, 지옥의 출근길을 그나마 버티고 산다. 골든슬럼버도 마찬가지. 범세계적으로 먹힐 만한 주제, 미미한 개인과 거대사회권력의 대치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 일본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부분들, 특히 주인공 아오야기와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관계와 같은 것들을 녹여낸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 요 근래 문제상황에 빠진 주인공의 고군분투 스토리를 자꾸 접하게 되는데, 난리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센스와 기지를 잃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 자꾸 빠져들게 된다. 영화로 이미 나와있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타케우치 ..
2011.09.06 -
빅픽처 - 더글라스 케네디
와인 한 잔을 더 마시고, 인화한 사진을 다시 꼼꼼하게 살폈다. 그밖에 다른 사진들에는 이전에 내가 품었던 자의식만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섯 장을 건질 수 있었던 건 내가 피사체에 사진가의 시각을 인위적으로 들이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사체의 얼굴에 집중하고, 그 피사체가 프레임을 결정하게 내버려두면, 모든게 제대로 굴러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와우. 정말 괜찮은 책이다. 팩트만 보면 피 튀기는 장르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우리네 인생사. 사진가의 꿈을 간직한 채 뉴욕 월스트릿의 성공한 변호사의 삶을 살던, 어찌보면 평범한 주인공이, 어쩌다 몬태나주 시골에서 발굴된 천재 사진가로서의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는 주인공 일인칭시점으로 풀어나가..
2011.09.02 -
숨쉬러 나가다 - 조지 오웰
또 하나 고백할 것은, 열여섯 살 이후로 내가 다시는 낚시를 해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사는 게 그런 까닭이다. 우리네 인생에서(인간의 삶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 이 나라에서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 못한다. (...) 그 일을 하기 위해 실제로 보낸 시간이 당신 인생에서 차지하는 몫을 계산해보라. 그러고 나서, 면도하고, 버스로 여기저기 다니고, 기차 환승역에서 기다리고, 지저분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신문 읽느라 보낸 시간을 계산해보라. 동물농장을 읽은 지가 십여년은 된 것 같다. 1984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조지 오웰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숨쉬러 나가다'는 1939년 2차대전 발발 직전에 발간 된 소설로,..
2011.08.30 -
저승에서 살아남기 - 아르토 파실린나
그런 다음 흰머리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아돌프 이바르 아르비드손(Adolf Ivar Arwidsson, 1791~1858, 핀란드의 역사가이자 시인)이었다. 아르비드손이 멀리까지 들리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스웨덴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이 되지 않고 핀란드인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되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이 등장하자마자 죽는다. 두둥실 떠오른 그의 영혼은 자유로이 공간을 넘나들면서 현세를 떠돌고, 그와 같은 처지의 다른 영혼들, 네안데르탈인이나 수백년 전의 교황, 심지어 예수님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사회에 현존하는 온갖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들에 직면해 고민하기도 하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한 할머니의 외로운 삶을 지켜보다 도와주기도 한다. 사후세계에 대처하는 ..
2011.05.24 -
나가사키 - 에릭 파이
나는 성공한 사람들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들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성공의 노리개,눈먼 자아의 노리개가 되기 때문이다. 온갖 대가를 치르고 얻는 자아는 인간의 종말이다. 한 중년 남자의 집 벽장 속에 숨어 일 년 동안 생활한 여자가 발견되었다는,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어이없는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후랑스 작가가 쓴 짧은 글. 책장을 여는 순간부터 한숨도 쉬지않고 읽어내려갈 수 있어서 좋았고,짧은 팩트만을 가지고 이만큼 사람의 내면을 이야기 하고, 서사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잔잔한 일본영화처럼 이미지가 살아나는 텍스트.그런데 후랑스 사람이 썼다는 게 아이러니. 11.04
2011.05.23 -
행복한 프랑스 책방 - 마르크 레비
우리는 모두 혼자야, 앙투안.여기에서건 파리에서건, 아니 어디에서건 말이야.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뭐든 하지.그래서 이사도 하고 어떻게든 고독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거야. 그건 변하지 않아. 지난 여름,이 소설이 원작인 영화, 마이 프렌즈, 마이 러브를 재밌게 봐서 고민할 것 없이 집어든 책인데,다 읽는동안 2010년이 되었다. 보통은 책이 영화보다 재미있게 마련인데,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이 책은 그냥 그랬다. 이야기 전개가 왠지 산만하고,이 두 친구의 우정이 어떤 것인지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달까. 그래도 이본의 이야기가 심화된 점이나,에냐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은 매력적이었다. 영화 적극 추천. 10.03
2010.03.07 -
싱글맨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물론 소수집단도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자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자의 생각에 빠지면, 흑인과 스웨덴 사람 사이에 아무 차이도 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 . (...) 우리는 소수집단이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집단의 결함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디자이너 톰 포드가 감독하고 콜린 퍼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원작이, 200여페이지 남짓하는 작고 가벼운 책 한 권이라는 사실에 혹 하기도 했고, 한 글자 한 글자 모여들며 시작하는 첫 문장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
2010.03.02